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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타버린 잿빛 마을에 눈물만...산불 폐허, 갈 곳 없는 이재민들의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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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르포 / 안동시 일직면 광연마을
불에 타 무너진 집, 뼈대만 남은 농기계
여전히 매캐한 냄새, 수백년 고목 두 동강
주민들 집 못가고 마을회관·경로당에
"끝없는 피해, 앞으로 어떡하나" 한숨
"사방에서 불 덮쳐...손이 아직 떨려"
"주거·농사 문제 해결해야" 한목소리

마을 전체가 흑백이 됐다.

산도, 나무도, 집도, 농기계도 불에 다 타버렸다.

경상북도 안동시 일직면 광연리 광연마을의 18일 모습이다. 

산불에 검게 탄 집들이 여러채다.

뒷산에 있던 푸르던 소나무들도 모두 타버려 검은색 잿빛이 됐다. 잎이 없어진 채 앙상한 모습만이 남았다.

마을 어귀부터 매캐한 냄새가 진동했다. 샛길을 따라 조금 더 들어가니 마을 중심에서 수호목으로 수백년을 버텼던 고목(古木)조차 이번 산불을 피하지 못한 채 두 동강이 났다.

경북 안동시 일직면 광연마을 뒷동산에 있는 나무가 불에 타 앙상한 모습이 됐다.(2025.4.18) / 사진.평화뉴스 정준민 기자
경북 안동시 일직면 광연마을 뒷동산에 있는 나무가 불에 타 앙상한 모습이 됐다.(2025.4.18) / 사진.평화뉴스 정준민 기자
수백년 광연마을을 지키던 보호수 느티나무도 화마를 피하지 못한 채 두 동강이 났다.(2025.4.18) / 사진.평화뉴스 정준민 기자
수백년 광연마을을 지키던 보호수 느티나무도 화마를 피하지 못한 채 두 동강이 났다.(2025.4.18) / 사진.평화뉴스 정준민 기자

올해 논밭에 심으려 했던 종자를 보관하던 창고도 화마에 재가 돼버렸다.

농민들은 "어떻게 지내야 하냐"며 한숨을 내쉬었다.

마당에 살던 강아지 백구와 누렁이도 털에 재가 잔뜩 묻어 어두운 색으로 변했다. 

수십년간 이 마을에서 산 주민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산불을 피해 친척 집으로, 대피소로 떠났다.

운이 좋아 집이 소실되지 않은 주민들은 이 일을 입에 올리기도 조심스럽다.

권시중(83) 할아버지는 "마을에 60가구 정도 살았는데, 30가구가 불에 타버렸다"며 "집이 불에 타버린 주민들은 친척 집이나 회관에서 자고, 또 모여서 밥 먹는 것을 반복한다. 고생이 너무 많다. 말로 못할 만큼 피해가 끝도 없다"고 말했다.

이어 "집이 불에 안 탄 사람은 집이 소실된 사람을 보면 미안해서 말 한마디도 조심해야 하고, 이야기도 잘 못한다"면서 "항상 마음으로 서로를 위로하고 살아가고 있다"고 덧붙였다.

불에 탄 마늘 종자와 바구니가 늘어붙은 모습(2025.4.18) / 사진.평화뉴스 정준민 기자
불에 탄 마늘 종자와 바구니가 늘어붙은 모습(2025.4.18) / 사진.평화뉴스 정준민 기자
불에 타버린 농기계를 하염없이 지켜보는 농민 김동수(69)씨의 모습(2025.4.18) / 사진.평화뉴스 정준민 기자
불에 타버린 농기계를 하염없이 지켜보는 농민 김동수(69)씨의 모습(2025.4.18) / 사진.평화뉴스 정준민 기자

마을 모퉁이에 있는 한 주택에서는 불에 타버린 창고를 정리하고 있었다.

다행히 집이 전소되지는 않았지만, 창고와 화장실, 부엌이 불에 탔다. 집 안에서 공기청정기를 아무리 작동시켜도 매캐한 냄새는 사라지지 않았다.

김동수(69)씨는 "마늘 종자와 경운기, 파종기, 수확기, 농산물 건조기 등 농사 장비들이 모두 탔다"면서 "농기계를 사는 데 돈이 엄청 많이 들었는데...어쩔 수 없다. 다 내 몫이다"라고 말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광연마을 경로당에는 이날 오후 주민 할머니 5명이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집이 전소돼 돌아갈 집이 사라진 이재민들이다.

화재로 인해 집이 불에 타면서 슬레이트 지붕이 무너져내렸다. 집들은 무너졌고, 뒷산은 검게 불탔다.(2025.4.18) / 사진.평화뉴스 정준민 기자
화재로 인해 집이 불에 타면서 슬레이트 지붕이 무너져내렸다. 집들은 무너졌고, 뒷산은 검게 불탔다.(2025.4.18) / 사진.평화뉴스 정준민 기자
집이 산불에 전소돼 뼈대만 남은 모습(2025.4.18) / 사진.평화뉴스 정준민 기자
'안동시 산불 피해 복구 계획표'가 광연마을 경로당에 내걸렸다. 이재민 할머니들은 경로당에 모여 산불 관련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2025.4.18) / 사진.평화뉴스 정준민 기자
'안동시 산불 피해 복구 계획표'가 광연마을 경로당에 내걸렸다. 이재민 할머니들은 경로당에 모여 산불 관련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2025.4.18) / 사진.평화뉴스 정준민 기자

이 마을 경로당과 마을회관에 임시로 거주하는 이재민만 20명이다.

방 한켠에는 이불이 가지런히 접힌 채 놓였고, 방 입구에는 "안동시 산불 피해 수습을 위한 지원부서 안내" 안내문이 붙었다. 방 안에는 안동시 재난안전대책본부가 붙인 "산불 피해 수습 및 복구 지원" 현수막이 보인다. 

이재민들이 머무르는 방 안에는 심리상담센터에서 배부한 PTSD(외상후스트레스장애) 진단서가 높였다. "사건이 다시 일어나는 듯한 생생한 느낌", "원치 않는 고통스러운 기억이 자주 떠오름" 등의 문구가 적혔다.

할머니들은 진단서를 보며 산불이 집 근처로 내려왔을 당시, 시내로 대피할 때의 이야기를 꺼냈다. "그때만 생각하면 손이 벌벌 떨린다", "이제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냐"는 걱정과 불안이 컸다.

이재민 피난처인 경로당에서 지내는 불편함도 컸다. 여자 숙소는 2층인데, 1층에 화장실이 있어 계단을 오르내리니 무릎이 아프다. 이재민 대부분이 60대 이상 고령층, 할머니와 할아버지들인 탓이다.  

이재민 이모(67)씨는 "산불이 난 뒤 불에 탄 집을 보면 매일 너무 속상하고 아직까지 진정이 안 된다"면서 "어떻게 하면 집을 다시 짓고 살 수 있을까 하는 걱정밖에 없다"고 토로했다. 또 "경로당에서 지내며 불편한 점은 많지만 어떻게 하겠냐"며 "단체 생활을 하니까 불편해도 서로 위로하고, 의지하면서 지낼 뿐"이라고 덧붙였다.

박청자(81)씨도 "그 좋은 2층 집도 타고, 통장도 타고 이제 남은 게 없다"면서 "산불 났을 때 정신이 하나도 없었고, 당시를 돌아보면 손이 벌벌 떨린다. 그냥 눈이 떠져 있으니 살고 있는 것"이라고 토로했다.

권기호(86) 할아버지가 불에 소실돼버린 창고 앞에 앉아 눈물 짓고 있다.(2025.4.18) / 사진.평화뉴스 정준민 기자
권기호(86) 할아버지가 불에 소실돼버린 창고 앞에 앉아 눈물 짓고 있다.(2025.4.18) / 사진.평화뉴스 정준민 기자
이재민이 된 김모(85) 할머니가 길가에 앉아 전소된 집을 바라보고 있다.(2025.4.18) / 사진.평화뉴스 정준민 기자
이재민이 된 김모(85) 할머니가 길가에 앉아 전소된 집을 바라보고 있다.(2025.4.18) / 사진.평화뉴스 정준민 기자
불에 타버려 쓸 수 없게 된 농기계가 창고에 보관돼 있다.(2025.4.18) / 사진.평화뉴스 정준민 기자

이재민들이 가장 원하는 것은 "집"과 "농기계"다. 전소된 집들에 대한 "빠른 철거"도 요구했다.

집이 모두 타버려 이웃의 집에 방 하나를 얻어 살고 있다는 김모(85) 할머니는 "누구한테 말도 못하고, 원망도 못하고 어떻게 하겠냐"면서 "불이 이리서도 내려오고, 저리서도 내려오고, 뒤에서도 오고, 사방에서 와서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살면서 이런 불은 처음"이라고 기억했다. 또 "빨리 안동시에서 집을 마련해주면 좋은데, 하루 이틀도 아니고 1~2년 넘게 안 걸리겠냐"며 "산불이 6.25전쟁 때 피난보다 더 하다"고 떠올렸다.

정부와 지자체가 이재민들에게 제공하기로 한 '임시주택'에 대한 불만도 나왔다. 주민 이옥자(64)씨는 "시골에는 사람이 살지 않는 빈집이 많은데, 왜 굳이 컨테이너(조립주택)를 짓는지 모르겠다"면서 "불편해도 빈집에서 지내다가 원래 살던 집이 철거되면 새로 집을 짓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밝혔다. 

창고가 불에 타 경운기와 건조대, 저장고를 잃었다는 권기호(86) 할아버지는 "당장 깨 농사를 지어야 하는데, 경운기를 포함해 농기계가 다 탔으니 막막하다"며 "산불 났을 때 시내로 대피하지 않고 경운기를 다른 곳으로 옮겼더라면 괜찮았을 건데...아내가 기어이 가자고 하더라. 손해가 크다"고 억울함을 토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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