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려거든 거기서 나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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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규 / 『유배지에서 예수 읽기』(백창욱 저 | 한티재 펴냄 | 2014.4)


   이스라엘 역사에서 민중들을 덮치는 시련은 권력에게 일차 원인이 있다. 불의한 권력일수록 자기 위에 계시는 야웨를 무시한다. 그런 폐단은 불평등 세상으로 나타나고, 특히 약자들이 벼랑으로 떨려난다. 그럴 때 야웨법에 충실한 사람들은 고난과 핍박을 감수하면서, 야웨 신앙을 지키기 위해 권력과 대척점에 설 수밖에 없었다. 야웨법의 근간인 평등 사회를 지키기 위해서. …중략… 그렇다면 오늘 한국 기독교와 교회 현실은 어떤가?
  하나님이 그토록 경계하고 조심하라는 정치권력과 지나치게 한통속이 돼버렸다. 2014년 3월 6일 행한 국가조찬기도회는 오늘날 개신교의 처지를 단적으로 보여주었다. 교계의 내로라하는 위인들이 죄다 박근혜씨를 칭송하기에 바빴다. 기도회는 구실일 뿐, 권력에 충성 다짐하는 자리였다. 그 장면을 보면서 무엇보다도 마음에 걸린 것은, 지금 이 순간에도 이 땅 처처에서 고통과 무너진 억장으로 신음하는 무수한 약자들, 지옥을 사는 사람들은 모르쇠하고 원인 제공 최고책임자를 향해 일방적으로 나팔을 부는 행태이다. 과연 저들이 진실한 예수 신자가 맞는가.
  『유배지에서 예수 읽기』는 바로 이런 문제의식으로 복음 말씀을 해석했다. 예수는 그 시대 지배세력을 거슬러서 민중에게 하나님 말씀을 어떻게 증거 했으며, 그 말씀을 읽는 나는 오늘날 어떻게 해석하고 적용하는가에 대한 이야기이다. 유배지와 다름없는 삶의 현실에서 민중은, 또 예수의 후예들은 어떻게 복음을 읽고 받아들이고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 말했다. -<책을 내면서>

 
 
 
통렬하다. 백창욱 목사의 말은 거침이 없다. 이 책에 실린 그의 글 또한 그렇다. 하긴 목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데 누구의 눈치를 보겠는가. 나같은 얼치기 예수쟁이의 소견으로는 구약에 등장하는 예언자들이 오늘 우리 곁에 있으면 백목사처럼 오지랖 넓고 바쁘고 시끄러운 목사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예언자의 삶은 고달프다. 하지만 어둡고 힘겨운 세월을 견디며 살아가는 민중에게 그의 존재는 위안이고 은총이다.

나는 사진 찍을 때 백목사 옆에 서는 걸 좋아한다. 내 키가 170cm가 안되기 때문에 사진에는 항상 폭 꺼지는 모습인데 160cm가 조금 안될 듯한 백목사 옆에 서면 좀 으쓱해지는 느낌이 든다. 게다가 30년이 넘는 세월을 교회에 다니다가 말다가 하면서 지금도 자신이 예수쟁이인지 아닌지 헛갈리는 나로서는 백목사 옆에 서서 사진이라도 많이 찍어 두면 그의 옷자락에 묻어서라도 함께 하나님나라에 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없지 않다.

사실 이 말이 웃자고 하는 이야기는 아니다. 집회에서나 기자회견할 때 백목사가 마이크를 잡으면 오늘은 무슨 말을 들려줄지 기대가 된다. 지난 1년여 동안 백목사에게서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견찰놈들’과 ‘한전놈들’이다.
 
백창욱 목사
백창욱 목사
지난 7-8년 동안 밀양과 청도의 산과 골짝과 마을을 가로질러 송전탑을 세우면서, 미끼를 던져 소수의 주민들을 꼬셔내고 갖은 협박으로 더 많은 주민들의 발을 묶고, 수십 년 동안 엉켜 살아온 시누이, 올케, 동서, 형님, 아우들을 이간질하고 서로 원수로 만들어 평화롭던 마을공동체를 갈기갈기 찢어 놓은 사기꾼에 협잡꾼 같은 한전놈들과, 그 한전놈들의 작업을 보장하기 위해 주인의 사냥질에 앞장선 개처럼 주민들을 내몰고 고착하고 물어뜯고 할퀴는 견찰놈들에게 백목사는 거침없이 호통을 친다. “야, 이놈들아, 먹고살기 위해서라는 구실로 네 놈들이 하는 짓을 정당화하지 마라. 어떻게 이 마당에 양심선언을 하는 놈이 하나도 없냐!”

백목사가 저들을 향해 호통을 치며 나무랄 때, 나는 통쾌함 뿐만 아니라 더러 나의 비겁함과 안일함과 나태함을 꾸짖는 서늘함을 느낀다. 그 순간이 나에게 하늘문이 열리는 순간이라고 나는 ‘신앙적으로’ 고백한다.

나는 살아온 날들보다 죽을 날이 더 가까운 이 나이에도, 죽은 뒤에 가게 될 천국에는 여전히 관심이 없다. 나에게 천국은 살아가면서 ‘실존적으로’ 부딪히는 순간들이다. 내가 나의 좁은 소견과 아집에서 벗어나 백목사의 말씀에 마음으로 “아멘”할 때 나는 천국에 가까이 있고, 피하지 않고 그 길을 걸어갈 때 나는 하나님나라 안에 있다. 고백하건대 지금까지 내가 하나님나라의 문을 두드렸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나라가 나에게 엄습해왔고, 그 앞에서 나는 수없이 미끄러졌고 가끔 성공하였다.

백목사의 음성은 가늘고 높다. 그러나 그가 전하는 메시지는 굵고 깊은 울림을 남긴다.

  지금 세상이라고 다를 게 뭔가. 여전히 자본과 권력은 사람을 대상화하여 노예로 부린다. 착한 사람만 그 체제 속에서 간신히 한자리 차지하고 겨우 살 수 있다. 강자의 화려한 폭력으로 꽉 막힌 세상에서 그저 선전을 통해 들이미는 것만 구입하고 먹고 누리라고 말한다. 진정 귀와 입이 되어야 할 언론매체에서는 영혼은 없고 재주만 있는 기술자들이 전면에 나서서 자본과 권력이 유포하는 거짓 선전만 흡수하라고 나팔을 분다. 불의하고 불공평하다. 어찌해야 할까. - <외치자, 에바다라고>

  오늘날 교회에 적용하자면 이렇다. … 한시라도 빨리 그 세계에서 탈출하는 게 사는 길이다. 사람들의 신심을 왜곡해서 권력자가 사유화의 수단으로 삼는 교회라면, 그 물적 토대를 당장 끊는 것이 서로 살 길이다. 그들이 교회를 사유화하는 유일한 이유는 교회의 물적 토대가 너무도 탐스럽기 때문이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무슨 미련이 있는지, 아니면 교회의 인적 네트워크, 커넥션, 카르텔에 엮여서인지는 몰라도 당최 그 세계에서 탈출할 엄두를 내지 못한다. 그래서 온건한 선지자인 예레미야조차 이렇게 말한다. “이 땅에 기괴하고 놀라운 일이 있도다. 선지자들은 거짓을 예언하며 제사장들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며 내 백성은 그것을 좋게 여기니 그 결국에는 너희가 어찌 하려느냐.”(예레미야 5:30-31) - <차라리 한 눈이 낫다>

  인간의 탐욕이 이성과 양심을 잡아먹었다. 저만 살겠다고 남의 고통을 외면하는 사람, 국가와 자본이 벌이는 악행을 뻔히 알면서도 내 일이 아니라고 침묵하는 사람, 권력이 자기 입맛대로 가공하고 조작한 선전을 진실인 양 의심 없이 받아들이고 그것대로만 판단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다. 그러면서 불행을 당하면 개인에게서 죄책을 찾고, 권력이 저지른 구조적인 악에 대해서는 눈을 감는다. 이런 사람들과 비극적 참사를 겪은 사람들이 다를 게 무엇인가? -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침몰 직전의 기울어진 배에서 선내방송이 흘러나온다. “안내 말씀드립니다. 현재 위치에서 절대 움직이지 마시기 바랍니다.”라고!!! 우리 모두가 탐욕의 짐승 ‘자본’이 다스리는 ‘지구’라는 매트릭스의 주민이고, 불의한 권력이 운행하는 ‘세월호’의 탑승자이다. 자본과 권력은 감시와 통제와 거짓 선전과 사탕발림으로 그들이 설정한 매트릭스의 경계 안에, 세월호의 객실 안에 우리를 가두어두고 함께 망하는 길로 이끈다. 오래 전부터 예언자들이 타전해왔던 절박한 탈출 신호를 백목사는 오늘 다급하게 우리에게 전한다.

“결국, 어떻게 되겠는가? 같이 망하고 만다. 그러므로 타락한 교회에 묻혀 있다가 같이 망하느니, 비록 관계망에서 소외돼서 거친 벌판에 홀로 서 있게 되더라도 진정 자기 영혼을 구하겠다면 그 세계에서 탈출해야 한다.”
“당신이 어느 편에 서 있는가를 돌아보고, 서 있는 자리가 잘못됐다면 지금 당장 발걸음을 옮겨 놓으라.”
 
 
 





[책 속의 길] 122
박수규 / 희년공동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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