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는 독자가 열쇠를 찾아야 하는 수수께끼다.” 19세기 프랑스의 상징파 시인, 스테판 말라르메의 말이다. 요즘의 ‘젊은 시’는 사전을 찾아가며 읽어야 할 정도로 예술 상호 간의 융합이 유행하고 있다. 시와 음악, 시와 과학, 시와 회화 등 시가 다른 예술을 포섭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문법처럼 되고 있다. 이제 시는 비유나 상징을 통해서 이해하는 것을 넘어서서 시각적인 이미지(이모티콘, 활자겹치기, 도형 등)를 텍스트 안에 도입하고 있다. ‘읽는 시’에서 ‘보는 시’로 이행하고 있는 느낌이다. 마치 추상회화 앞에선 초보 감상자처럼 ‘제멋대로의 느낌’으로 감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또한 생성형 AI의 등장으로 질문만 잘하면 어떤 시는 시인보다 시를 더 잘 써주는 시대가 온 것이다. 이러다가 창작은 AI에게 맡기고 인간은 질문만 하면 되는 ‘시 편한 세상’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
이러한 시적 경향은 문학의 가장 중요한 기능 중의 하나인 반성과 성찰의 기능을 잃어버리는 위기를 가져올 수도 있을 것이다. 아무리 화려한 수사를 동원해서 아름다운 시를 쓰더라도 시를 통해 내가 어떤 인간인지 성찰하지 못한다면 시는 하나의 장식품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챗GPT에게 물어봤다. “너는 자기 성찰을 할 줄 아니?” 대화형 챗봇은 친절하고 빠르게 대답한다. “저는 자기 성찰을 할 수 있는 능력은 없지만, 여러분이 자기 성찰을 할 수 있도록 도와드릴 수 있어요. 자기 성찰은 자신의 생각, 감정, 행동을 깊이 들여다보고 이해하는 과정이에요. 이를 통해 자신의 강점과 약점을 파악하고,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기회를 찾을 수 있죠.” 오, 친절하고 겸손한 AI, 인공지능의 자기 성찰과 반성도 시간문제다 싶다.
시 쓰기에 대해 이런저런 고민을 하고 있던 중에 채형복 시인께서 시집을 보내주셨다. 영화에 <내부자들>이 있다면, 시집 버전으로는 『교수님 스타일』 (문학여행, 2024. 6.)이 있다. 교수사회의 위선과 허위를 고발하는 채형복 시인의 시집이 세상에 나왔다. 은산철벽처럼 가려져 있던 교수사회를 풍자하는 연작시 60편이 이 시집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나는 몇 해 전, 이 시집의 원고를 미리 읽어볼 기회가 있었다. 풍자나 해학의 문학적 장치로 감싸있긴 했지만, 시집이 출간되면 이 연작시를 쓴 시인이 교수사회에서 ‘왕따’를 당할 것 같아 우려를 전해드린 바가 있다.
내부를 고발하는 일은 어렵다. 김민기의 <친구>에 나오는 노랫말처럼 “눈앞에 보이는 수많은 모습들, 그 모두 진정이라 우겨 말하면, 어느 누구 하나가 홀로 일어나 아니라고 말할 사람”은 드물고 귀하기 때문이다. 이 시집을 ‘교수님’들은 읽지 않을 것이다. 아니다, ‘교수님’들이 가장 많이 읽을지도 모른다. 구석방에 숨어서 몰래 읽으며 키득키득, 웃을지도 모른다. 도제적 관습이 아직까지 가장 많이 남아있는 곳이 교수사회라고 나는 알고 있다. 사전적 의미의 도제 교육은 일대일의 교육 방식을 통해 제자는 오랜 기간을 스승과 함께하면서 스승의 전문 지식과 기술을 체계적으로 배울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왜곡된 도제 교육은 제자에게 노예적 굴욕감을 안겨 주거나, 허위와 거짓을 먼저 가르쳐 주기도 하는 것이다. 교수사회를 연작시를 통해 통렬하게 비판한 풍자시집은 채형복 시인의 이번 시집이 처음이 아닐까 싶다. 시인은 단호하게 말한다.
"학자는
세상 눈치 보며
구차하고 비루하게 사느니
혀를 깨물어 자진하고
자신을 속이거나 죄짓지 말고
밥값은 하며 살아야 한다"
(채형복, <시인의 말>)
자기 성찰과 반성이 없다면 시는 써서 무얼 하나, 진실한 자세 하나 얻으려고 개고생을 하며 시를 쓰는 것이 아닌가. 자신을 천길 벼랑 끝으로 몰아세우고 손을 놓을 수 있는 용기가 있는 자만이 자기가 누구인지 알 수 있다.
교수님 스타일·8 – 폴리페서
교수님은
힘을 옹호하셨다
국가가 강해야
기업이 강해야
국민을 보호할 수 있다 강변하셨다
교수님은
약자를 경멸하셨다
게으르기 때문에 가난하고
가난한 자는 비천하다며
국가 재정만 축낸다고 비난하셨다
교수님은
권력에 천착하셨다
폴리페서는 명예로운 칭호였고
언제든 떠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교수님의 존재 이유는?
권력이었다
(채형복, 『교수님 스타일』)
이 시를 들여다보니 ‘민중을 개돼지로 취급해야 한다’는 어느 고위공직자의 말이 생각난다. 학문을 연구하고 학생을 가르치는 직업을 자기 출세의 발판으로 삼아, 마침내 국회에 진출하고 장관이 되는 사례를 우리는 부지기수로 보아왔다. 국립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가 되기까지 오랜 시간 동안 시인이 침묵하며 견뎌온 내밀한 고백과 고발이 이 시집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시인은 묻고 답한다. 교수님의 존재 이유는 권력이었다, 라고.
채형복 시인의 시적 미덕은 빙빙 둘러대지 않고 단도직입으로 대상을 겨누는 데 있다. 동시에 준열한 자기반성을 통해 독자들로 하여금 ‘부끄러움’에 동참하게 만든다. 그 부끄러움은 패악의 시대와 떳떳하게 불화하지 못하는 한심한 자기 양심에 대한 부끄러움이다. 난해한 시들이 들끓는 요즘, 모처럼 반가운 시집을 만났다. 이번에 출간한 채형복 시인의 아홉 번째 시집이 ‘근엄한 교수님’들의 사랑을 ‘특히’ 많이 받는 시집이 되었으면 좋겠다. 투병 중인 시인의 쾌유도 함께 기원한다.
[책 속의 길] 223
김수상 / 시인
* 김수상. 의성에서 태어났다. 2013년 『시와표현』으로 등단. 시집으로 『사랑의 뼈들』, 『편향의 곧은 나무』, 『다친 새는 어디로 갔나』, 『물구라는 나무』, 포엠 에세이집으로 『새벽하늘에서 박하 냄새가 났다』가 있다. 제4회 박영근작품상, 제7회 작가정신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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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