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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치산 아버지, 뭉클한 인간의 향기
이정연 / 『아버지의 해방일지』(정지아 지음 | 창비 펴냄 | 2022)
2022년 11월 08일 (화) 17:50:32 이정연 pnnews@pn.or.kr

안녕하세요? 저는 10월문학회 이정연입니다. 10월문학회는 대구 사람들도 잘 모르는 10월항쟁의 정신을 계승하고자 2014년에 만들어진 모임입니다. 오늘 아침 페북에 6년 전 오늘이라며, 영천 백학학원의 모습이 뜨더군요. 6년 전 오늘, 10월문학회 회원들은 영천 10월항쟁 서사시집 《시월》을 쓴 이중기 시인을 따라 답사를 다녔습니다. 그중 백학학원은 시인 이육사가 처가인 영천에 머무를 때 공부했던 곳입니다. 이곳에서 공부한 사람 중에 의열단간부학교로 간 이가 네 명입니다. 그중에는 이육사뿐만 아니라 ‘북경감옥 형장에서 눈가리개 거부한 채 열네 자루가 발사한 일제 총알 다 받아낸’ 이도 있습니다.

그날 우리는 백학학원을 지나 보현산 쪽으로 더 깊숙이 자리잡은 구전마을에도 갔습니다. 구전마을은 대구에서 시작해 남한 전역으로 퍼져나간 10월항쟁의 주요 저항지이자 마지막 피난처였습니다. 그 마지막 피난처에서도 몸을 숨길 수 없었던 이들이 산으로 올라가 야산대가 되었고 그들은 2년 후 여순항쟁 때 산으로 올라간 이들과 연결돼 유격대가 되고 이후 한국전쟁으로 이어집니다. 우리나라 빨치산의 원조가 10월항쟁으로부터 비롯한 것이지요.

《아버지의 해방일지》에 나오는 아버지 고상욱이 바로 여순항쟁 후 산으로 올라가 빨치산이 된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이 책은 빨치산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아버지가 죽었다.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평생을 정색하고 살아온 아버지가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진지 일색의 삶을 마감한 것이다.’로 시작합니다.

빨치산이라니! 대한민국에서 오랜 시간 금기어여서 아직도 편하게 발음할 수 없는 말이 ‘빨치산’이죠. 그런데 이 책은 빨치산의 이야기를 정면으로 다루면서도 첫 단락만 봐도 느낄 수 있듯 지금껏 우리가 ‘빨치산’에 대해 갖고 있던 무거운 이미지를 확 깨버립니다.

이 책의 매력은 무엇보다 유머입니다. 한 문장을 읽고 다음 문장을 빨리 읽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이어지는 다음 문장이 매번 신선하기 때문입니다. 예상 밖의 문장을 만나 하하하 웃다가 어느 순간 울컥해서 책장을 덮고 숨을 고릅니다. 글자 무더기일 뿐인 그곳에서 우리는 지금 이곳에서 발견하기 어려운 너무나 인간적인 인간의 모습을 만나기 때문입니다. 저만 그런 게 아니라 읽는 사람마다 다 그런 모양입니다. 이 책은 입소문을 타서 출간된 지 2개월 만에 알라딘 11월 판매율 1위입니다. 한 달 먼저 출간된 김훈의 《하얼빈》을 넘어서고 있습니다. ‘빨치산’이 ‘안중근’을 이기다니요.
 
   
▲ 『아버지의 해방일지』(정지아 지음 | 창비 펴냄 | 2022)

부끄럽지만 저는 이번에 정지아라는 작가의 이름을 처음 알게 됐는데 이름이 세련돼 젊은 작가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책날개 안쪽 ‘1965년 전남 구례에서 태어나’로 시작하는 지은이 소개말을 읽고 신인 작가가 아닌 걸 알았고, 소설을 읽으면서 어쩌면 정지아가 본명이겠다 싶었습니다. 이 소설의 서술자로 나오는 딸의 이름이 ‘고아리’였는데 부모가 빨치산으로 보냈던 백아산의 ‘아’와 지리산의 ‘리’에서 따온 거라는 내용이 있거든요. 어쩌면 정지아란 이름도 지리산의 ‘지’와 백아산의 ‘아’가 아닐까 싶었는데, 얼마 전 정지아 소설가와 이웃하며 구례에 사는 시인 선생님을 만나 여쭤봤더니 맞다고 합니다.
말하자면 고아리는 작가 정지아의 분신인 것입니다.

<아버지는 시골 태생이긴 하지만 농사를 지어본 적이 없었다. 노동자와 농민이 주인 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싸웠지만 정작 자신은 노동과 친하지 않았던 것이다. 아버지에게 노동은 혁명보다 고통스러웠다. 얼어 죽고 굵어 죽고 총 맞아 죽는다는 전직 빨치산이 고추밭 김매는 두시간을 참지 못해 쪼르르 달려와 맥주컵으로 소주를 원샷할 때마다 나는 내심 비웃으며 생각했다. 혁명가와 인내의 상관관계에 대하여. 인내할 줄 아는 자는 혁명가가 되지 않는다는 게 고등학생 무렵 내 결론이었다.> (『아버지의 해방일지』중에서)

함께한 동지들이 목이 잘린 채 나뒹구는 것을 수습하고도 의연하게 살아가는 빨치산이 일상의 노동을 고통스러워한다는 냉정한 응시는 빨치산의 딸이 한 말이기 때문에 비아냥이 아닐 수 있는 것이겠지요. 우스꽝스러운 상황 묘사나 너무 인간적이어서 비어져 나오는 웃음도 서술자 고아리가 작가 정지아의 분신이어서 편안하고 눈물겨울 수 있듯이요.

조직을 보존하기 위해 위장 자수를 하고 산에서 내려온 아버지는 오랜 시간 감옥 생활을 하기도 했지만, 감옥에서도 밖에서도 민중을 위한 삶을 살았습니다. 가족보다 남을 더 위할 때 아내가 불만스러워하면 역시 빨치산 활동을 했던 아내에게 “자네 혼차 잘 묵고 잘살자고 지리산서 그 고생을 했는가? 자네는 대체 멋을 위해서 목심을 건 것이여!”로 두말하지 못하게 합니다.
빨치산 출신 부모가 바란 세상은 ‘혼차 잘 묵고 잘사’는 세상이 아니라 ‘항꾼에(같이, 함께) 잘 묵고 잘사’는 세상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증인을 믿는 조카를 지지하고, 암내 때문에 시집도 못 보낸다고 걱정하는 동네 사람의 딸을 병원까지 데리고 가 수술을 시켜줍니다. 고등학교를 그만둔 다문화 가정 아이와는 담배 친구가 되기도 합니다.

아버지에게 부모보다 자식보다 아내보다 더 귀했던 그 민중들이 아버지의 장례식에 저마다의 방식으로 부조를 합니다. ‘떡집 언니’는 남은 자들의 음식을 세세하게 책임지고, 아버지의 초등학교 동기이자 교련 선생이면서 조선일보 구독자인 ‘박선생’은 문상객을 데리고 하루에도 몇 차례씩 옵니다. 아버지처럼 동네 머슴을 자청하는 ‘박동식’은 부고 문자 돌리는 것부터 시작해 장례 절차 처음부터 끝을 다 관장하고, 장례식장 사장님도 상주를 동생으로 여기며 보자마자 반말이지만 장지에서 쓸 소주까지 부조합니다.

‘빨치산의 딸이라는 천형에 가난까지 물려받은 것만으로도 지긋지긋한’ 이가 아버지의 죽음 이후 아버지를 회상하며, 그리고 장례식장에 온 사람들을 통해 툭툭 드러나는 아버지와의 사연을 통해 아버지를 훨씬 더 입체적으로 이해하게 됩니다. 비로소 아버지와 편안하게 화해하고 떠나보낼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아버지의 해방일지’가 되는 거죠.

저는 10월문학회를 하며 ‘빨갱이’의 아들 딸로 살아온 분을 여럿 뵈었습니다. 대구에는 10월항쟁유족회가 있습니다. 전국 각지에 있는 100개 넘는 유족회 중 ‘항쟁’이란 말을 명시한 거의 유일한 유족회인데 회장님과 총무님이 다 여성입니다. 소설 속 고아리처럼 사랑하는 사람의 앞길을 막을까봐 결혼을 못하기도 했습니다. 아버지가 학살되고 젊은 나이에 홀로된 어머니가 온갖 수모를 겪으면서도 자식을 버리지 않고 살아준 것이 고마워 어머니를 떠나지도 못했습니다.

<아버지는 백운산에 가장 오래 있긴 했지만 이산 저산 떠돌며 48년 겨울부터 52년 봄까지 빨치산으로 살았다. 아버지의 평생을 지배했지만 아버지가 빨치산이었던 건 고작 사년뿐이었다. 고작 사년이 아버지의 평생을 옭죈 건 아버지의 신념이 대단해서라기보다 남한이 사회주의를 금기하고 한번 사회주의자였던 사람은 다시는 세상으로 복귀할 수 없도록 막았기 때문이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의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그래서 아버지는 고작 사년의 세월에 박제된 채 살았던 것이다.> (『아버지의 해방일지』중에서)

저는 10월문학회를 하기 전까지 ‘빨갱이’란 말을 뒤집어 쓴 채 연좌제에 묶여 옴짝달싹할 수 없는 이런 삶이 있는지도 몰랐습니다. 10월항쟁유족회 회장님은 해방둥이인데 아버지가 1946년 10월항쟁 때 활동하시다 사라지셨습니다. 총무님은 1950년생이신데 전쟁 중 끌려가 학살된 유복녀입니다. 이분들 역시 한평생 빨갱이의 딸이라는 멍에를 내려놓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지난 10년 가까이 이분들 곁에서, 역사를 알아가고 아버지를 자랑스러워하며 억울하게 돌아가신 아버지의 자리를 바로잡아 주려 노력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특히 이곳이 대구란 걸 생각하면 그 노력이란 것이 얼마나 힘겹고 지난한 일이었겠습니까.

"저리 겡우 바르고 똑똑헌 양반이 왜 하필 뽈갱이가 되얐을꼬."
그래놓고는 꼭 한마디 덧붙였다.
"하기사 그 시절에 똑똑흐다 싶으먼 죄 뽈갱이였응게."
"똑똑헌 사램만 뽈갱이였가니. 게나 고동이나 죄 뽈갱이였제."

(『아버지의 해방일지』중에서)


70여 년 전, ‘게나 고동이나 죄 뽈갱이였’다고 합니다. 열흘 전 대한민국의 수도에서 시퍼런 목숨들이 어이없이 사라진 것에 대해 국가는 뭐하고 있었냐고 분노하는 당신과 나도 그 시절이었다면 다 빨갱이였을 겁니다.

이 책을 읽으며 ‘빨갱이’ 운운. 그게 얼마나 촌스러운 공격인지 한 방에 날려버린 통쾌함을 느꼈습니다. 그러므로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빨갱이 해방일지’입니다. 더불어 긴 시간 자유롭게 말하고 생각하지 못한 우리 모두의 해방일지입니다. ‘빨치산의 딸’로 살아와 이 소설을 써 준 정지아 작가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합니다.

 
   
 
 






 
 [책 속의 길] 210
 이정연 / 교사. 10월문학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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