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언제와"...고국 떠나 13년, 내 이름은 '후세인'

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 입력 2013.05.06 1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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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등록 이주노동자 / 일자리 전전, 체불에 산재..."그러나 지금은 갈 수 없다"


새 목재가 들어왔다. 주문서를 들고 만들어야 할 문짝과 문틀 개수를 확인했다. 선반에 목재를 올려놓고 크기와 시트지 색깔, 무늬를 적어 넣었다. 자로 길이를 표시하고 붉은색 시트도 옮겼다. 기계에 목재를 넣고 버튼을 누르자 톱밥이 사방으로 튀었다. 알맞게 잘린 목재를 선반에 다시 옮겼다.

장갑을 낀 채 목재를 쓸어낸 뒤 사포질을 시작했다. 어느 정도 다듬고 목재에 남은 톱밥을 입으로 후후 불었다. 부드러워진 목재를 프레스기에 올려놓고 목재 표면과 프레스기 고무바닥에 본드 스프레이를 살포했다. 프레스기에 시트를 걸고 버튼을 눌렀다. 강한 열기가 느껴지고 3분 뒤 시트지가 목재에 달라붙어 나왔다. 문이 완성됐다. 이제 하나 만들었다. 아직 수백개의 문짝을 더 만들어야 한다.

3일 오전 9시 경북 경산시에 있는 한 목공소. 파키스탄 북동부 지방의 작은 마을에서 한국으로 온지 13년이 된 후세인(가명.35)씨는 이 공장에서 3년째 일을 하고 있다. 매일 아침 8시부터 저녁 8시까지 원룸이나 모텔에서 주문하는 문짝과 문틀을 만든다. 하루 평균 100여개를 만들고 일이 많으면 다음날 새벽까지 야근을 하기도 한다. 직원이 7명밖에 되지 않아 생산에서 포장까지 함께 일을 한다.

목재를 다듬고 있는 후세인씨(2013.5.3) / 사진. 후세인
목재를 다듬고 있는 후세인씨(2013.5.3) / 사진. 후세인

"겨울에는 일이 별로 없다. 봄에 일이 많다. 요즘 바쁘다. 주문하는 문 모양도 모두 다르고 어려운 작업도 많다. 그래도, 공장 사람들이 한 식구같이 일하고 있어서 손발은 잘 맞는다"


완성된 문은 다시 프레스기에 넣고 비닐 포장을 해 지게차에 올려놓는다. 20개가 쌓이면 공장 밖으로 옮기고 저녁이 되면 화물차에 싣는다. 같은 일을 3년째 하다 보니 일을 하는 속도는 처음보다 많이 늘었다. 하지만, 사방에 톱밥이 날아다녀 언제나 목은 칼칼하다. 눈도 따갑다. 작업복에 붙은 톱밥도  떨어질 줄 모른다. 특히, 고글이나 분진마스크가 없어 가끔 얼굴로 톱밥이 튀면 애를 먹기도 한다.

게다가, 지난 2003년 대구 성서공단 현대자동차 부품 공장에서 일하면서 고장 난 프레스기에 오른손 손가락 3개가 절단돼 목재를 옮길 때면 손에 고통이 느껴지기도 한다. 시간이 많이 지나 남은 엄지와 검지로 일하는데 큰 불편을 느끼진 않지만 무리를 한 날은 그날의 고통이 손끝을 타고 올라온다.  

그래도 이전에 일하던 공장들에 비하면 지금 일하고 있는 목공소는 "천국"이다. 3년 동안 사고 한 번 없었고 임금이 체불된 적도 없었다. 기숙사 방도 혼자 쓰고 인터넷도 사용할 수 있다. 폭행과 폭언을 하는 직장동료도 없다. 게다가, 도시 외곽에 있어 정부의 합동단속이나 강제추방에 걸릴 위험도 적다.

후세인씨는 2003년 프레스기에 눌려 손가락을 잃었다(2013.5.5) / 사진. 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후세인씨는 2003년 프레스기에 눌려 손가락을 잃었다(2013.5.5) / 사진. 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손가락 3개 잘렸다. 처음에 너무 아팠다. 아직도 그날 밤 생생하다. 옆에서 운전하던 과장은 소리 지르지 말라고 했다. 피가 너무 많이 나고 뼈가 보였다...근데 이제 다 나았다. 4년 동안 치료했다. 요 손가락 두 개가 일 다 한다. 남들보다 더 빨리한다. 지금 사장이랑 친구들 착하다. 재미있게 일 한다"


후세인씨는 지난 2000년 산업연수생으로 한국에 왔다. 대학까지 졸업했지만 파키스탄에는 일자리가 없었고 동생도 부산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래서, 브로커에게 25만원이라는 "거금"을 주고 노동비자를 발급받았다. 동생에 이어 자신마저 외국으로 떠나자 어머니가 극구 만류했지만 돈을 벌기 위해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리고, 제일 먼저 성서공단 오토바이 부품 공장에서 일을 하기 시작했다.

하루 14시간씩 일하고 100만원도 안되는 월급을 받았다. 하지만 매달 가족들에게 월급을 송금할 수 있어 뿌듯했다. 그리고, 몇 년 뒤 다른 파키스탄 동료에게서 현대자동차 부품공장에서 일을 하자는 제의를 받았다. 대기업이고 월급도 많이 준다는 말에 선뜻 옮기기로 했다. 그러나, 짧은 시간에 많은 제품을 생산해야한다면서 회사는 웬만하면 안전장치를 켜지 말고 프레스기를 사용하라고 했다.

목재를 옮기기 위해 공장 밖으로 나온 후세인씨 / 사진. 후세인
목재를 옮기기 위해 공장 밖으로 나온 후세인씨 / 사진. 후세인

얼마 후 여자 동료 2명이 손가락을 잃었다. 옆 라인 40대 아저씨도 손가락 4마디를 잃었다. 얼마 되지 않아 후세인씨도 사고를 당했다. 회사는 3천여만원을 보상비로 지급했다. 후세인은 그 돈을 들고 파키스탄으로 돌아왔다. 떠난 지 3년 만에 손가락을 잃은 아들을 보고 어머니는 눈물만 흘렸다. 한국에 가지 말라는 말만 반복했다. 그러나, 후세인은 보상비만 가족들에게 주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깁스하고 갔다. 내 손 붙잡고 엄마가 울었다. 울지 말라고 했다. 오히려 씩씩하게 말했다. 그래야 다시 일하러 가도 걱정 안하지. 그래도 한국으로 떠나는 날 엄마 내 이불 속에서 울었다. 사람들한테 내가 한국가도 우리 엄마 돌봐달라고 부탁했다. 그 모습이 살아있을 때 본 엄마의 마지막 모습이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3년짜리 노동비자가 만료됐다. 고국으로 돌아가야 하지만 홀어머니와 두 동생, 삼촌들, 할머니, 할아버지까지 10여명의 대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맏이인 자신이 가장역할을 해야 했다. 게다가, 지난 2004년 결혼을 하면서 두 아이까지 태어나 일 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미등록에 손가락까지 절단된 그를 받아주는 곳은 없었다. 그러던 중 성서공단 사출공장에 일자리를 얻었다. 야간 근무지만 다시 돈을 벌게 돼 기뻤다. 2년 가까이 일하며 성실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동료가 계속 자신의 일을 후세인에게 넘겨 업무 과다로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었다.

목재 길이를 재는 후세인씨 / 사진. 후세인
목재 길이를 재는 후세인씨 / 사진. 후세인


이번에는 달성군 현풍면 한 목공소에서 일자리를 얻었다. 하지만, 임금이 하루 이틀 늦어지더니 2-3주 지나고 한 두 달이 지나도 소식이 없었다. 사장은 계속 기다리라는 말만 했다. 신고를 하고 싶어도 미등록이라 신고를 할 수도 없었다. 결국 체불임금은 아직까지 받지 못했다.

이후, 지금 일하는 목공소를 소개받았다. 그렇게 3년이 지났다. 생활은 예전보다 많이 안정됐다. 동생도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일을 하고 있고 함께 살던 다른 가족들도 돈을 벌기 위해 이사를 나갔다. 월급 전액을 가족들에게 보내지 않고 150만원 중 30만원은 생활비로 남겨둔다. 다만, 미등록 이주노동자라 한번 나가면 다시 한국으로 돌아올 수 없어 10년째 고국에 못가고 있다는 현실이 마음 아플 뿐이다. 특히, 2009년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 마지막을 지키지 못해 가슴에 사무친다.

"딸과 부인. 한국서 일하는 이유다. 전화기 붙잡으면 '아빠, 언제와 어디야' 묻는다. 보고 싶다. 그러나, 지금 갈 수 없다. 파키스탄 일자리 없다. 트랙터기도 사고 집도 지어야 한다. 한국...내 손가락 가져가고 엄마 장례식도 못 가게 했지만 돈을 벌게 해줬고 가족들 먹여 살릴 수 있게 해줬다. 또, 이렇게 다쳐도 일도 배우게 해줬고 좋은 사람도 많이 만났다. 내 13년 신께서 안다. 좋았다. 후회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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