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림막 뒤 국가관과 광장에 나선 시민의 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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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택진 칼럼] "아직은 포기해서는 안된다. 세상은 결코 저절로 좋아지지 않는다"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
 링컨의 케티스버그 연설로 유명한 이 문구는 정부운영의 근본원칙과 방향을 간명하게 밝혀준다. 링컨은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가 지상에서 사라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했지만 지구상에 존재하는 정부 중에 이것을 완벽하게 실현한 정부는 찾아보기 어렵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한국현대사를 돌아봐도 절대다수 국민의 지지를 받아 민주적 정통성을 갖추면서도 집권 5년 동안 국민의 사랑을 받았던 대통령의 이름을 흔쾌히 떠올리기 힘들다.

 8.15 광복 이후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4.19혁명에 의해 쫓겨났고 박정희와 전두환은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찬탈했다. ‘사사오입’, ‘체육관선거’라는 단어는 국민의 뜻을 왜곡하고 국민에 의하지 않은 정부의 탄생을 이르는 부끄러운 과거의 상징이다. 87년 6월 민주항쟁을 거치며 직선제개헌을 쟁취하고 군부독재에서 민간대통령 시대로의 전환을 이루었던 80년 후반과 90년대 초반은 최소한의 절차적 민주주의를 이뤄간 시기였다. 그 이후 최초의 수평적 정권교체로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되고 연이은 참여정부의 탄생까지 대한민국에서 야당도 정권을 잡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며 대한민국도 이제는 민주주의 사회라고 불러도 좋을 듯 했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 5년을 거치면서 목격한 민주 평등 인권 평화의 보편적 가치의 후퇴는 국민의 손으로 뽑은 정부가 국민에게 큰 근심꺼리가 될 수도 있음을 보여주었다. 선거를 통해 선출된 대통령과 정부라 하더라도 집권 이후 국민에 의거하지 않는 국정운영은 필연코 국민을 위하지 않는 결과로 나타남을 확인시켜 준 것이다. 선거는 국민의 대표를 뽑기 위한 합법적 절차인 것이지 ‘선출된 권력’에게 무소불위 일방통행의 국정면허를 부여한 것은 아닌 것이다. 국민의 국민에 의한 정부의 정통성과 정당성은 선거가 끝남과 동시에 무한자격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집권 5년 내내 낮은 자세로 구현해야 하는 중대한 과제임을 각인해야 한다.

 이른바 ‘국정원 댓글사건’으로 연일 정국이 뜨겁다. 과거 군사독재시절 정보기관의 국내정치와 선거개입을 경험한 국민들은 60, 70년대나 있을 법한 불법적 선거개입 의혹에 대해 실망감을 드러내고 있다. 절차적 민주주의가 확대되어 가고 명칭도 바꾸면서 거듭나겠다는 몇 번의 약속에도 국가정보원의 권력바라기 속성에 대해 의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선거는 민주주의의 꽃이며 선거과정의 민주성, 투명성, 공정성은 자유민주주의 제도의 근본적인 담보이다. 선거업무를 관리 수행하는 선관위를 비롯한 국가기관이 이를 지키는데 앞장서야 함은 물론이다.

그러나 국가정보원은 가장 민감함 시기에 ‘대북심리전단’이라는 이름으로 정당정책과 특정후보에 부정적인 ‘댓글’들을 직간접적으로 게시하며 여론을 움직였다. 이의 결과가 대선에 영향을 미쳤는가는 차치하더라도 이미 그 행위 자체가 민주적 여론형성에 역행하는 행위임은 명백하다. 김용판 서울경찰청장과의 통화, 권영세 김무성의 발언으로 확인된 2007년 정상회담록 사전유출 의혹 등에 국가정보원이 어김없이 등장한다. ‘자유와 진리를 향한 무명의 헌신’이라는 국정원의 원훈이 과거 안기부의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는 부훈과 묘하게 오버랩 된다.

<경향신문> 2013년 8월 20일자 1면
<경향신문> 2013년 8월 20일자 1면

 사람 사는 세상에 어떤 문제도 있을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인지한 문제를 어떻게 고치는가 하는 것이다. 이명박 정부의 국가정보원에서 발생한 일은 박근혜 정부에서 매듭을 지어야 한다. 하나는 정보기관의 위상과 역할에 대한 재고이며 두 번째는 국가기관이 개입된 대선과정의 시비에 대해 말끔히 정리하고 가야 하는 것이다. 최근에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과정을 보건데 박근혜 정부는 두 가지 모두 해결할 의지가 없어 보인다. 청문회에 증인으로 참가한 국정원 현직 직원들의 증언은 박근혜 정부의 국가정보원의 조직적 입장이라고 봐야 한다. 모범답안지(?)를 들고 있는 증인들의 모습은 치밀한 사전준비를 거쳤고 자신들에게 불리한 답변은 피하고 유리한 답변은 적극적으로 진행하는 정보기관다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자신들의 ‘댓글’행위에 대한 정당성을 지속적으로 주장하는 모습은 앞으로도 국가정보원이 이런 활동을 지속하겠다는 의지로 비춰진다.

 ‘초원복국집’ 사건의 당사자인 김기춘의 비서실장 임명은 박근혜 정부의 향후 방향에 대해 몇 가지를 짐작케 한다. 김기춘 비서실장은 과거 중앙정보부 대공수사국 출신이며 노태우 정권시절 법무부장관으로 92년 대선 당시 부산지역 주요기관장 등을 모아놓고 지역감정을 조장해야 한다는 발언을 한 사람이다. 이런 사람을 집권 6개월 만에 새로운 비서실장으로 임명했다는 것은 향후 정국운영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51.6%라는 유권자 과반수의 지지를 얻은 대통령, 또 한편으로는 3.6%, 108만 표의 근소한 차이로 당선된 대통령이 대선과정에 국가정보원의 댓글을 통한 선거개입 의혹에 대해 명명백백하게 가려내고 매듭짓지 못한다면 이 정부 5년 동안 ‘댓글’ 꼬리표를 달고 다녀야 할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진행된 국정조사 청문회도 사실상 끝이 나가는 상황에서 박근혜 정부의 향후 입장은 남은 임기 동안 이 정부의 미래를 예측하는 중요한 근거가 될 것이다.

‘시대가 아무리 마음에 안 들더라도 아직은 포기해서는 안 된다. 세상은 결코 저절로 좋아지지 않는다.’ 영국의 사학자 에립홉스봄의 말이다. 전진이 있으면 후퇴가 있고, 후퇴가 있으면 다시 전진하는 날도 있지 않겠는가? 다만 후퇴 후의 전진은 앞의 전진보다 몇 배의 노력을 더 요구할 것이다. 정부의 정부에 의한 정부를 위한 국민임을 거부하자. 저절로 좋아지지 않는 세상에 가림막 뒤의 ‘김직원’과 ‘민국장’의 국가관과 신념보다 광장에 나선 시민들의 상식적인 생각과 노력이 세상을 조금씩 변하게 할 것임을 믿는다.





[오택진 칼럼] 15
오택진 / 평화뉴스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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