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평리 광복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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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홍철 칼럼] 민중의 평화는 어디에서 오는가


"왜정 때도 이래 모질게는 안 했다"

삼평리 평화방송, 매일 아침 6시 10분부터 아침밥 먹기 전까지 송전탑 공사현장 앞에서 여는 집회를 우리는 그렇게 부른다. 지난 7월 21일 새벽 동이 트기도 전, 500여 명의 경찰병력을 앞세워 한전이 기습적으로 공사를 재개한 뒤로, 삼평리 평화방송은 하루를 여는 중요한 의식(儀式)이 되었다. 새벽잠을 설치고 일찌감치 나온 할매들과 농성장에서 밤을 지샌 연대시민들이 인사를 나누고, 또 하루의 결의를 다진다. 무엇보다 한전과 시공업체 직원들의 출근과 교대를 막기 위한 투쟁이 날마다 이렇게 시작된다.

삼평리 평화방송은 대책위 공동대표 백창욱 목사의 기도로 시작하기도 하고, 누군가 시(詩)를 낭송하거나 삼평리 할매들 이야기를 엮은 <삼평리에 평화를> 같은 책의 한 대목을 낭독하기도 한다. 고전에 밝은 이는 모두를 위해 ‘즉석 인문학 강의’로 아침 시간을 풍요롭게 해주기도 한다. 돌이켜보면 7월과 8월의 뙤약볕과 태풍을 견디며, 무엇보다 경찰의 초강경 대응과 한전 직원들의 거침없는 폭력에 맞서 우리가 하루하루를 견딜 수 있었던 힘은 어쩌면 아침에 서로 나눈 ‘좋은 말’의 기운에서 비롯된 바 컸다.  

8월 15일 아침이었다. 소형 앰프를 설치하고, 피켓을 챙기고, 그렇게 평화방송을 준비하고 있을 때였다. 저만치 동네 어귀 쪽에서 할매 한 분이 기다란 장대를 들고 공사장 쪽으로 구부정하게 걸어오고 있는 게 보였다. 이억조 씨, 동네에서 이어댁이라 부르는 70대 중반의 할매다. 그리고 할매가 들고 있는 긴 장대 끝에는 낡은 태극기가 매달려 있었다. “우리도 광복절 기념식 하자!” 다른 할매들보다도 더 여리고 눈물 많은 이억조 씨의 말에는 어떤 결기가 묻어 있었다. 그 낡은 태극기는 할매의 할아버지 때부터 내려온 ‘가보’ 중 하나라고도 했다. 태극기가 매달린 장대를 농성장 천막 기둥에 단단히 붙들어 매고, 우리는 할매의 제안에 따라 ‘광복절 기념식’을 거행했다. 

“광복절이 어데 보통 날입니꺼. 빼앗깄던 나라를 도로 찾은 날 아입니꺼. 그란데 우리 삼평리는 지끔 마을을 뺐깄어예. 삼평리도 광복해야 합니더. 한전 너거도 오늘은 일하지 마라. 왜정 때도 이래 모질게는 안 했다.”

이억조 씨는 다른 삼평리 할매들과 함께 7월 21일 이후 공사장 앞에서, 그리고 레미콘 트럭 앞에서 ‘공사중단’과 ‘지중화’를 요구하다, 한전 직원과 경찰들에 의해 수없이 끌려나오고 고착당해왔다. 여경들에게 폭행을 당해 부상당하고 실신해 병원으로 후송되기를 거듭했다. 그런 폭력에 떠밀려 더 이상 갈 곳이 없어지자 경북도청으로 찾아가 김관용 도지사를 붙들고 눈물로 호소하기도 했다. 하지만 돌아온 답은 어이없게도 ‘강제퇴거’ 명령과 ‘전원연행’ 조치였다. “중재를 위해 노력하겠다”던 도지사의 약속은 형식적인 면담 주선 외에 이행된 바가 없다.

경북 청도 각북면 삼평리 주민 이억조 할머니가 눈물을 흘리며 김관용 경북도지사에게 "송전탑 공사 중단"을 호소하고 있다(2014.8.18) / 사진.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경북 청도 각북면 삼평리 주민 이억조 할머니가 눈물을 흘리며 김관용 경북도지사에게 "송전탑 공사 중단"을 호소하고 있다(2014.8.18) / 사진.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은 ‘왜정’보다 모진 폭력의 민낯으로 이 작은 마을을 점령하고는 ‘국가기간시설’인 송전선로 건설에 항의하는 할매들을 가혹하게 낭떠러지 끝으로 몰아붙였다. 할매들 말대로 ‘지옥 같은’ 날들이었다. 한때 ‘광복’을 맞았던 할매들의 국가는 어디로 갔는가. 이억조 씨가 광복절 아침에 게양한 낡은 태극기는 “국가는 지금 우리에게 무엇인가” 하는 강력한 항변으로 나부낀다.

"국가는 지금 우리에게 무엇인가"

삼평리 광복절 기념식에서 나는 언젠가 써 두었던 졸시 한편을 읽었다. 

새벽종이 울리지 않아도

새벽종이 울리지 않아도
삼평리 새 아침은 밝아온다.

농민들이 지켜온 땅은
역사상 단 하루도 헌 마을이었던 적,
없다. 땅을 모르는 지배자들,
하늘마저도 우습게 아는
불경스런 놈들에게나
이 평화로운 삶이 낡은 것으로
보이는 법이다.

그들 귀에는, 그들 눈에는
힘을 모아 어둠을 밀어내는
저 부지런한 새소리, 밤새
내려온 이슬이 기지개켜며
숲으로 다시 돌아갈 채비를 하는
눈부신 몸짓, 두런두런 서로의 안부를 묻는
나락이삭들과 은사시나무들의
다정한 설움이 들리지 않고
보이지 않는다.

그러니 낡았다고 여긴다.
정체되었다고 여긴다.
가난하다고 규정한다.

함부로 쇳소리 울리며, 군홧발소리
울리며, 자신들이 설계한 새아침을
이 땅에 이식하려 한다.
구조조정하려 한다.
새마을을 만들겠다고 한다.
송전탑 꽂고 핵발전소 돌려
가짜 해를 솟게 하겠다고 한다. 해서,
저 송전탑의 이데올로기는,
박정희의 새마을, 독재자의 새아침과
정확히 일치한다. 허깨비들의 아우성,
쇠붙이들의 행진곡, 완장 찬 껍데기들의 요란한
나팔소리, 호루라기 소리

그러나
이 마을은 역사상 단 하루도
멈춰 있어본 적이 없다.
단 한번도 헌 마을, 낡은 마을,
죽은 마을이었던 적이 없다.

새벽종이 울리지 않아도
삼평리 새 아침은 여지없이,
의연하게 밝아온다.

경북 청도군 각북면 삼평리, 23호기 송전탑 공사가 진행되고 있다(2014.8.27) / 사진. 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경북 청도군 각북면 삼평리, 23호기 송전탑 공사가 진행되고 있다(2014.8.27) / 사진. 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지금 이 작은 마을에서 벌어지고 있는 싸움은 단지 송전탑 한 기를 둘러싼 갈등이 아니다. 이곳 삼평리는 한때 우리 할매․할배들이 어깨춤 추며 환호해 마지 않았던 ‘국가’와 그 할매․할배들이 평생 스스로 일구어왔던 ‘마을’이 날카롭게 부딪치고 있는 전장이다. 민중의 평화는 어디에서 오는가. 이 질문이 계속되는 한, 싸움은 결코 끝난 것이 아니다. 설령 송전철탑 조립이 끝나고, 전선이 걸리고, 만에 하나 신고리 3호기 핵발전소가 완공된다 하더라도…






[변홍철 칼럼 32]
변홍철 / '청도 345kV 송전탑 반대 공동대책위원회' 집행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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