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주변에 의사들이 많다. 학교 선·후배와 동기 중에도, 친지·가족 중에도, 친구의 자녀 중에도 의사들이 많다. 한 달에 한 번 만나는 내 친구도 대학병원장·의료원장을 지냈다. 그래서 알고 싶은 게 있으면 만나서도 전화로도 편하게 물어본다. 질병에 대해서도 내가 모르니까 전문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쉽게 말해준다. 의료대란에 대해서도 상식선에서 이해할 수 있게 일반화하고 객관화하여 상황을 설명해준다.
그런데 이번 의료대란을 보면서 정부의 높은 관리인 국무총리, 복지부장관, 복지부차관 등 핵심들 주변에는 의사들이 전혀 없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국민 불안은 병원을 떠난 전공의 잘못이다”, “어려워도 진료유지는 가능하다”, 그리고 “응급실에 전화할 수 있으면 경증이다”, 이처럼 자신있게 판단하고 기준을 제시하는 것을 보면 의사들이 전혀 없는 별세계에 사는 인간같아 보였다. 만약 선후배나 동기 중에, 친구의 자제 중에, 자신의 자녀 중에 의사가 있다면 그런 말을 할 수 있을까, 그런 정책을 입안하고 집행할 수 있을까. 설령 전혀 없더라도 그 업무 책임을 맡은 이상 당사자의 사정을 상세히 알아보고 치밀성을 바탕으로 계획을 수립하고 시행하는 게 사기업이나 개인들에게도 일반적인 순서일 것이다. 더구나 파급력이 지대한 국가 고급관리로서는 잠시도 잊어선 안 될 사안이 아닌가. 그런데 응급실에 군의관을 배치하는 모양을 보면서 “상식으로 접근하기 어려운 사람들이구나!” 싶었다. 군의관 거의 대부분이 생명을 다투는 응급실에 맞지 않아 근무지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점을 예상하지 못했다는 게 딱할 정도이다.
지난 2월 6일 정부가 ‘2025학년도 의대 정원 2000명 증원, 2035년까지 의사 1만명 확충’을 골자로 한 의과대학 입학정원 확대방안을 발표한 이후 의사협, 의대교수, 병원 전공의, 의대생 등 의료계의 반대와 함께 의료대란은 시작됐다. 의료개혁의 필요성은 일정부분 공감하지만 방법론의 질적 수준은 너무나 낮았다. 고급관료라면 이성적 사고는 할 수 있을 것으로 추정했는데 착오였다. 심하게 말해서 예스맨만 모아놓은 것같아 보였다. 정부의 요지부동이 이어지며 7개월이 지난 현재까지 더욱 악화됐음에도 불구하고 국무총리는 지난 3일 국회에서 “의료시스템이 붕괴됐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느긋하게 답변했다. 복지부장관도 같은 날 “의료체계 붕괴된다는 것은 과한 말씀”이라며 국무총리의 답변에 차분하게 지원했다.
‘의료시스템이 붕괴되지 않았다’고, ‘과한 말씀’이라고 한다면 이들 관료들은 진짜로 의료시스템 붕괴를 어떤 양상으로 설정하고 있는지 상상이 가지 않는다. 전국 종합병원의 그 많은 전공의들이 병원을 떠난 자체가 붕괴 아니면 무엇인가. 종합병원 응급실이 제 기능을 못하고 있고, 의대생들이 수업을 거부하고 등록을 하지 않는 게 붕괴가 아니면 무엇인가. 그게 일시적인 현상인가, 원상복구가 가능한가.
의료대란의 문제는, 정부가 내년 대입부터 시행한다는 의대 입학정원 증원의 당사자와 교감없이 거의 일방적으로 밀어붙인 데에 있다. 아무리 증원을 반대할 거라고 예상했더라도 의사들과 의대생들, 더구나 의대 졸업후 의사면허를 받고 종합병원에서 불철주야 환자를 보면서 수련하는 인턴 레지던트 등 전공의들의 의견을 제대로 수렴하지 않은 데에 있다. 무리하게 강행하는 대신에 설득하고 타협하며 타결점을 찾고 신뢰를 구축하면서 순리로 처리했다면 이러하지는 않을 것이다. 특히 미래를 향해 자부심과 긍지로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매진해온 전공의들의 사기를 망가뜨려 놓은 것은 회복 불가능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서울대학병원 전공의 대표는 지난 4월 30일 정부에 “전공의를 악마화하지 말고 자부심과 긍지를 갖고 환자 곁에서 일할 시스템을 만들어달라”고 호소한 바 있다. 넉 달이 지났다.
지난 5일 보다 못한 의학계 안팎 원로교수들이 개입했다. “지금 정부가 추진 중인 의료개혁은 대한민국 의료를 ‘공멸’의 길로 내몰고 있다”는 시국선언문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이들은 정부를 향해 “무리한 의대 정원 증원을 중단하고, 대한민국 미래를 위한 합리적인 대책을 세우라”고 촉구했다. “의대 정원 증원 시도는 법적·제도적·절차적 정당성을 갖추지 못했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엎질러진 물이 된 것인가. 누구의 말처럼 ‘버스는 지나갔다’는 게 맞는가. 지난 6일 뒤늦게 한동훈이 ‘여야의정 협의체 제안’을, 대통령실이 ‘제로베이스 논의 가능’을 언급했지만 분위기는 냉랭하다.
의료대란을 해결할 방법은 없는가. 결자해지(結者解之)뿐인가. 9일부터 대입 수시모집에 들어가면서 이미 내년도 대학입시는 시작됐다. 실기(失機)했는지도 모른다. 의료대란 의료붕괴는 의료공백으로 넘어간다. 의협은 9일 2025년과 2026년 의대증원을 취소하고 27년 정원부터 논의하자고 다시 제안했다. 이날 의협은 ‘의료정상화를 위한 대국민 호소문’에서 “위기를 해결할 유일한 방법은 전공의들의 복귀”라며 “그들(전공의들)은 떠나면서 7가지 요구를 했는데, 그 중 첫번째가 의대 증원 및 필수의료 정책패키지 전면 백지화다. 2025년을 포함한 의대 증원 취소가 없으면 전공의들은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6일자 영남일보에 실린 <누가 우리의 ‘브란트’가 될 것인가>라는 이재윤칼럼이 눈에 띈다. 폴란드의 유대인 게토를 방문한 빌리 브란트(당시 독일 총리)가 갑자기 무릎을 꿇어 세상을 놀라게 한 데 대해 많은 사람은 그 장면을 “브란트가 무릎 꿇음으로써 독일이 일어섰다.”고 평한다면서 ‘브란트의 ‘슬퇴(膝退)’는 굴욕도 굴복도 아니다’라고, ‘용기다’라고 칼럼은 설파했다.
앞으로 누가 책임질 지는 모르지만 이번 의료대란의 최대 피해자는 결국 시민이다. 최근 만난 의사 친구는 말했다. “추석연휴, 아프면 안된데이! 내가 대학병원 의사라도 어쩔 수 없데이!”
[유영철 칼럼 36]
유영철(兪英哲) / 언론인. 전 영남일보 편집국장. 언론정보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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