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들의 천국」이 물었던 것, 그리고 우리가 다시 기억해야 하는 것
1976년 발간된 「당신들의 천국」은 나환자 치료소가 있던 소록도를 배경으로 지배자와 피지배자, 권력과 저항,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 자유와 사랑의 문제를 서로 다른 시간대를 배경으로 한 서사와 다양한 인물들의 시선으로 담아낸 장편소설이다. 군의관 출신인 조백헌 대령의 병원장 부임에서 시작되는 서사는 섬을 개조하려는 병원장의 정념에 의해 진행되는 간척 사업과 축구팀 결성 과정 등을 그리고, 한편으로는 이러한 조백헌의 시도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보건과장 이상욱과 황희백 장로 등의 시선을 대비시킴으로써 조백헌 대령이 건설하고자 했던 ‘천국’의 본질을 심도 있게 형상화한다.
이 소설은 1972년 유신 이후 더욱 심화된 박정희의 개발독재의 현실을 알레고리 형식으로 그려냈다는 평가를 받은바 있는 작품이다. 하나 상기할 대목은 소설에서 병원장 조백헌 대령이 추진하는 사업을 견제하는 이상욱 과장, 황희백 장로 등의 의심이 일제강점기 주정수 원장의 낙원건설의 욕망과 그로 인한 고통의 기억에서 기인한다는 점이다. 이는 현실적으로 박정희의 개발독재가 조선 점령에 대한 일본 측의 입장을 대변하는 식민지근대화론의 주장을 소환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일본의 점령이 조선의 근대화에 기여하였다는 식민지근대화론 등의 논리로부터 박정희의 개발독재가 자유로운가, 과연 방어가 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이와 관련하여 소설의 인물인 황희백 장로는 간척 공사 중에 일어난 폭동 과정에서 원생들을 대표하여 병원장 조백헌에게 다음과 같이 질타한다.
“도대체 사람이 할 수 있는 일과 없는 일을 분별해내는 데는 이 문둥이들보다 늘 깨우침이 늦단 말야, (...) 더러운 문둥이 피라고 함부로 남의 피를 흘리게 하는 데서, 거기서부터 배반은 시작되고 있었던 게란 말씀이야”
“더러운 문둥이 피라고 함부로 남의 피를 흘리게 하는 데서, 거기서부터 배반은 시작되고 있었다”는 것, 문둥이의 천국을 만든다는 명목으로 문둥이를 억압하고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있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경제개발을 이유로 힘없는 국민들을 고통으로 몰아놓고 수많은 사람들의 인권을 침해하며 장기독재를 한 것이 어떻게 국민들을 위한 것인가. 박정희의 공과를 물을 때, 그의 공으로 인정하는 경제발전이 어떻게 고스란히 박정희의 몫이 될 수 있는가, 그의 개발독재는 전태일과 같은 수많은 노동자의 피와 고통의 강 위에 치러진 것이 아닌가. 한국 경제발전의 한 축이 되었다는 경부고속도로는 베트남전쟁에 참전한 가난한 우리 젊은이들의 피와 눈물, 그리고 불과 30개월의 짧은 공기를 맞추기 위해 죽어간 노동자들(공식적으로 77명)의 주검 위에 건설된 것임을, 왜 우리는 늘 망각하는 것인가.
소설 속 이상욱 보건과장은 조백헌 원장의 신념과 명분의 독점성을 거부하며 이렇게 묻는다.
“문제는 명분이 아니라 그것을 갖게 되는 과정이었다. 명분이 과정을 속이지 말아야 한다. 명분이 제물을 요구하지 않아야 한다. 천국이 무엇인가, 천국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 속에서 마음으로 얻어질 수 있는 것이었다. 스스로 구하고, 즐겁게 봉사하며 그 천국을 위한 봉사를 후회하지 말아야 진짜 천국을 얻을 수 있게 된다.”
문제는 명분이 아니라 과정이고, 명분은 제물을 요구하지 않아야 한다. 국민들을 밥 먹고 살게 한다는 명분이 어찌 수많은 사람들을 비참의 상태에 몰아넣고 그들의 삶과 생명을 파괴하는 일을 정당화시킬 수 있는가. 바람직한 공동체의 건설은 권력자에 의해 독점되어서도 안 될 뿐만 아니라 건설 과정도 구성원의 자발적인 참여와 협력에 기초할 때 비로소 진정한 것이 된다는 점이다. 이상욱 과장은 병원장 조백헌이 건설하려는 천국이 “철조망 울타리가 둘러진 문둥이의 천국”임을 상기시키며 소설의 결말에서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선택과 변화가 전제되지 않는 필생의 천국이란 오히려 견딜 수 없는 지옥일 뿐입니다. (...) 진정한 천국이라면 전 그것을 누리고자 하는 사람에게 먼저 선택이 행해져야 할 것이고, 적어도 어느 때엔가는 보다 더 나은 자기 생의 실현을 위해 그 천국을 버릴 수도 있어야 하는 것으로 믿고 싶습니다.”
박정희의 개발독재에 대한 진정한 평가는 오늘날 우리 공동체의 미래를 위해서도 반드시 선행되어야 할 작업이다. 동상 건립은 그 이후로 미루어도 늦지 않다.
박정희 동상의 건립의 부당성과 홍준표 시장의 태도
동상을 건립하는 것은 그 동상과 관련된 어떤 의미를 사회화하는 일이며, 건립 주체자의 의지를 표명하는 일이다. 동상 건립은 누군가를 기리는 일이고, 그 누군가를 둘러싼 어떤 의미를 공동체의 가치로서 승인하는 일이다. 홍준표 시장은, 호남에 김대중 대통령의 동상이 있는데 왜 대구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동상이 없는지를 동상 건립의 중요한 논거로 제시하였다. 홍시장에게 다시 묻는다. 왜 그러한지 당신은 모르는가. 박정희 관련 시설 건립을 왜 다른 지자체에서 진행할 수 없는지는 두말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박정희의 개발독재 기간에 있었던 수많은 국가폭력으로 인해 희생된 사람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고통 속에 있을 유족들이 동대구 광장에 선 박정희 동상을 보며 어떠할지 당신은 전혀 생각하지 않는가. 홍준표 시장은 답해야 한다. 그래도 동상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면, 당신은 더 이상 대한민국의 정치지도자로서 아무런 자격이 없는 사람이다.
홍준표 시장은 최근 자신의 SNS에 “공직 입문 후 40여 년 동안 내 방식대로 살아왔기에 아직도 건재한 것이다” “세상이 나를 어떻게 평가하는지는 중요치 않다.” “내가 어떻게 세상을 사는지가 중요할 뿐이”라고 적은바 있다. 이것이 어찌 한 지역민의 공복(公僕)으로서 지자체의 장이 자랑처럼 내세울 말인가. “내 방식”이 아니라 국민들의 삶과 고통을 헤아리는 현실 속에 지자체 장의 생각은 구상되고 실천되어야 하는 게 아닐까.
지난 주에 내륙도시 대구에 2035년 상용화하기로 한 소형원자력발전소 건설이 추진된다는 뉴스가 보도되었다. 대구경북신공항 건설의 대가로 대구로 편입된 군위 50만㎡의 땅에 소형모듈원자로(SMR) 건설을 위한 협약을 한수원과 체결한다는 것이다. 놀랍다. 그 어느 지자체도 선뜻 나서지 않은 내륙 원자력발전소 건설을 주민들과의 아무런 협의 없이, 어떤 공청회 과정도 없이 추진하다니, 참으로 경이롭다.
홍준표 시장은 총선을 정리하는 한 지역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부산처럼 수틀리면 홱 돌아서는 때가 있다는 걸 보여줄 수 있어야 돼요. 그래야지 대구시민들 경북도민들을 깔보지 않지. 깔보잖아요. 실컷 밀어줬더니 깔보잖아요. 배알도 없어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시민들의 삶에 중차대한 영향을 미칠 일을 당사자인 대구-군위 시민과 어떠한 공적 논의과정 없이 자신의 뜻과 방식대로 추진한 것은, “홱 돌아서”지 못하는 우리 대구-군위 시민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인가. 홍준표 시장이야말로 대구-군위 시민들을 깔보는 것은 아닌가. 한 공동체의 미래는 공동체 구성원이 참여하고 선택하는 과정에서 도래하는 법이다. 선택과 변화에 대한 참여가 권력자에 의해 독점될 때 공동체의 미래는 ‘유토피아’가 아니라 ‘디스토피아’가 될 수 있다. 박정희의 개발독재를 보며 이청준이 던진 물음이다.
[김문주 칼럼 10]
김문주 / 문학평론가. 영남대 국문과 교수. 평화뉴스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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