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항쟁' 기억모임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유영철 칼럼]


'… 민중의 목숨 절로 일어났는데 그게 어째서 죄악이던가/ … 양심이 일어났는데 그게 어째서 반역이던가/…'. 위령탑 뒷면에는 백기완의 시 '대구 10월항쟁에 띄우는 비나리'가 새겨져 있다.

 ‘나락 베다 끌려간 늙은 아버지가 오신다/… 혼인날 받아놓았던 더벅머리 육손이도 있다/ 숫돌에 낫 갈다 말고 집 나갔던 아들이 온다/ 칙간에 앉았다가 머리채 잡혀 나간 아낙이 보인다/ 씹던 보리밥 뱉어내며 자빠지던 아이도 있구나/ 귀싸대기 몇 대에 반역을 덮어쓴 어리보기가 보인다/ 세상을 한 번 갈아엎고 싶었던 장부도 거기 있다/…’.
위령탑 부근에 있는 시비들 가운데 하나인 농민시인 이중기의 ‘진혼가’이다.  

 이 위령탑은 ‘10월항쟁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 위령탑’이다. 대구시 달성군 가창면 용계리128 가창댐 아래 용계체육공원에 있는 이 위령탑은 대구시가 10월항쟁 발생 74년만인 2020년 10월 건립했다. 위령탑에는 희생자 573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10월항쟁 및 한국전쟁 전후 희생자들이다. 위령탑도 ‘10월 항쟁’이라고 각인했다. 왜 이곳에 세웠을까. 이름을 항쟁으로 명명하는 데에 얼마나 시간이 걸렸을까.
 
10월항쟁 위령탑에 적힌 민간인 희생자들의 이름(2021.10.1) / 사진.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10월항쟁 위령탑에 적힌 민간인 희생자들의 이름(2021.10.1) / 사진.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역사는 아무리 숨기려 해도 왜곡하려 해도, 그 진실은 주머니 안 송곳처럼 뚫고 나오는 것인가. 꼭 알아야 할 중요한 역사이더라도 진실을 숨기고 왜곡하면, 대부분은 숨기고 왜곡한 역사를 사실인 양 알고 있는 것인가. 대구 10월 항쟁은 지금 어떤 역사인가. 진실의 역사인가, 왜곡의 역사인가. 나는 ‘대구 10월’을 알고 있는가. 어떤 역사를 알고 있는가.

  일제 36년 압제에서 해방된 우리는 눈물을 흘리며 감격했다. 빼앗긴 주권을 되찾은 우리는 식민지 일제를 청산하고 새로운 나라를 세우기에 부푼 꿈을 꾸었다. 그러나 해방된 나라의 한쪽인 남한에 미군정이 들어섰다. 더구나 미군정은 우리의 기대와는 달리 일제를 잇는 듯했다. 친일 관료들을 고용했다. 토지개혁도 하지 않았다. 식량정책을 제대로 펴지 않았다. 일제와 같은 식량공출을 시행했다. 굶주림, 기아상태에 이르렀다. 우리가 바라던 나라건설은 자꾸만 멀어져갔다. 세상이 바뀐 줄 알았는데 식민지시대의 구조가 미군정에 의해 그대로 유지 또는 재생산되는 것 같았다. 그토록 바랐던 해방의 모습이 이런 거였던가.

 해방후 1년여 지난 1946년 10월 1일, 그동안 쌓였던 실정에 대한 분노가 대구에서 대규모 시위로 나타났다. 이른바 ‘대구 10.1사건’이다. 대구는 위령탑에도 사건경위 부분에 적혀있다시피 ‘한국전쟁 이전 경북지역의 중심지로서 전국적으로 다른 지역에 비해 해방후 미군정하에서 민족주의 세력과 친일세력 그리고 좌우익의 갈등이 첨예하게 대립하였고 따라서 지식인을 중심으로 한 사회운동과 좌익활동이 비교적 활발하게 일어났던 곳’이었다. ‘대구 10.1사건’은 대구에서 경북으로 그리고 남한 거의 모든 지역으로 확산됐다.
 
사진 출처. KBS대구 <기억, 마주서다> - 제4부 '시월, 봉인된 시간'(2019.1.6일) 방송 캡처
사진 출처. KBS대구 <기억, 마주서다> - 제4부 '시월, 봉인된 시간'(2019.1.6일) 방송 캡처

  미군정과 경찰은 계엄령을 선포하고 시위대를 무력으로 진압했다. 사상자가 발생했다. 군경은 관련자들을 잡아갔다. ‘골’로 보내졌다. 가창골, 경산 코발트광산, 칠곡 신동재 등에서 집단 사살됐다. 위령탑이 건립된 대구 달성 가창골은 10월항쟁 직후부터 한국전쟁 시기까지 많은 민간인이 군경 등에 의해 법적 절차없이 무차별 희생된 곳이었다. 미군과 초대 정권은 공산당 빨갱이들이 선동해 일어난 폭동이라고 규정했다. 1948년 이승만 정부 수립이후 정부는 ‘국민보도연맹’을 만들어 10월항쟁이후의 좌익을 ‘보호하여 지도한다’는 미명하에 좌익으로 분류한 사람들을 가입시켰다. 그러나 한국전쟁 시기 색출된 보도연맹원은 끌려가 무더기로 생죽음당했다.  

 그동안 10.1항쟁 유족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1960년 4.19이후 잠깐 억울함이 공론으로 되는 듯하다가 이내 아무 소리조차 못하고 쥐죽은 듯 지내는 정권이 계속됐다. 6.10 민주화운동 이후 겨우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2000년대 이후 유족과 지역언론과 학계의 문제제기가 이어지면서 2007년부터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의 재조사작업이 착수됐다. 진실·화해위원회는 국가책임을 인정해 유족들에 대한 사과와 위령사업을 지원하도록 권고하는 결정을 내리게 됐다.

  10월항쟁유족회와 대구 경북에 사는 뜻있는 분들이 지난해 7월부터 10월항쟁의 진상규명과 희생자 명예회복을 위해 ‘10월항쟁을 기억하는 시민모임’을 준비해왔다. 그리고 지난해 10월 10월항쟁 시민모임을 정식으로 발족했다. 10월항쟁 당시를 기억하는 유족은 3명만 남았으며 모두 아흔 살이 넘었고, 피해자의 2세도 대부분 70대여서 녹취 증언자료 수집 등을 위해 시민모임의 필요성이 미룰 수 없을 정도로 절실해졌다고 판단됐기 때문이다. 유족회와 시민모임은 발족에 이어 오는 27일 대구에서 ‘10월항쟁을 기억하는 시민모임’을 창립할 예정이다.
 
10월항쟁 유족들이 국가폭력에 의해 희생된 가족들의 이름을 부르고 있다.(2023.10.6. 달성군 가창면 10월항쟁·한국전쟁전후 민간인희생자 위령탑') / 사진. 평화뉴스 정준민 기자
10월항쟁 유족들이 국가폭력에 의해 희생된 가족들의 이름을 부르고 있다.(2023.10.6. 달성군 가창면 10월항쟁·한국전쟁전후 민간인희생자 위령탑') / 사진. 평화뉴스 정준민 기자

 10월항쟁유족회는 명확한 진실규명, 국가의 책임있는 배상과 보상, 유해발굴 및 추모공원 조성, 사실에 근거한 정확한 역사교과서 기술 등이 뒤따라야 한다고 강조한다. 또한 10월항쟁을 대중에 알리려는 노력도 절실하다고 말한다(경향신문 2023. 10.30일자 “진상규명 아직 먼길”…‘대구 10월항쟁’ 알리려 연대조직 꾸리는 유족).

 10월항쟁 그리고 보도연맹으로 인한 피해 가운데 다음과 같은 채집된 에피소드가 눈물짓게 한다. '그 중에 하나! 산청군 어느 두메에서는 살육의 대제전이 있은 뒤 한 집에 개와 어쩌다 어머니와 죽음을 동행못한 젖먹이만이 남아있었는데 학살의 대사업이 있은 사흘 만에야 이웃마을 사람이 가보았더니 개가 어린애의 젖을 먹이고 있더라고. … 지긋지긋하게도 그 많은 죄없는 동포들이 짐승보다 더 참혹한 생죽음을 당해도 10년이 지나도록 입도 한번 달싹 못하던 어른들이 어린 학생들이 피로써 늙은 독재정권을 거꾸러뜨리자 이제 와서 어리둥절하는 꼴들은, 부질없이 핑계를 꾸미지 말고 차라리 개를 배우라. 산청의 개의 사랑을 배우자!'(1960년 5월23일자 부산일보 ‘차라리 개를 배우자’ 소설가 요산 김정한의 상자기사. 김기진(2002) ‘끝나지 않은 전쟁 국민보도연맹’, 역사비평사. 재인용).  

 대구에서 발생해 전국으로 확대된 1946년 10월항쟁, 늦었지만 역사적 사실을 살펴보고 그날이후 희생된 분들과 숨죽여 살았던 그 후손들을 생각하며 보듬어주는 마음을 가졌으면 좋겠다. 80년이 다 돼가는 10월항쟁은 그러나 미해결 부분이 너무 많아 우리 모두가 치유하고 극복해야 할 과제이기 때문이다.

 나락 베다 끌려간 늙은 아버지, 혼인날 받아놓았던 더벅머리 육손이, 숫돌에 낫 갈다 말고 집 나갔던 아들, 칙간에 앉았다가 머리채 잡혀 나간 아낙, 씹던 보리밥 뱉어내며 자빠지던 아이, 귀싸대기 몇 대에 반역을 덮어쓴 어리보기, 이들은 죄없는 우리들의 이름이 아니었던가.

 
 
 






 [유영철 칼럼 33]
 유영철(兪英哲) / 언론인. 전 영남일보 편집국장. 언론정보학 박사

 

저작권자 © 평화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기사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당신이 좋아할 만한 기사
지금 주목 받고 있어요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