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신자론’의 근원은 정치 생명에 대한 불안
‘계엄-탄핵’ 사태는 또다시 우리에게 큰 숙제를 안겨주었다. 박근혜 탄핵 때도 그랬듯이 이번에도 탄핵소추안 가결 후 국민의힘 내부에서 ‘배신자론’이 터져 나왔다. 국민의힘의 상당수 국회의원들도 계엄을 정당하다고 평가하지는 않는 듯한데, 그러면서도 탄핵소추안에 반대하지 않은 의원을 ‘배신자’라고 거세게 비난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유치한 조직 이기주의 탓일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자신의 정치 생명에 대한 불안감이 더 근본적인 이유일 것이다.
‘배신자론’의 밑바닥에는 정치판을 양대 정당이 복점(複占)하고 있다는 사실이 깔려 있다. 양대 정당 체제에서는 국민이 두 편으로 갈라지고, 유권자는 자기편 정당의 가치나 후보의 자질이 훌륭해서 ‘지지’한다기보다 상대 정당과 후보를 ‘저지’하기 위해 투표한다. 사회 전반에 혐오와 대결이 일상화된다. 이런 정치판에서 정치인이 소속 정당을 ‘배신’하면 차기 선거에서 공천되기 어렵다. 공천이 곧 당선으로 연결되는 특정 지역에서는 ‘배신’이 더 어렵다. 그래서, 정치 생명에 연연하는 자신을 합리화하기 위해 탄핵 찬성파를 ‘배신자’라고 규탄한다.
‘배신자’의 한 사람인 국민의힘 김상욱 의원(울산 남구갑)의 예를 보자. 김 의원은 같은 당의 안철수, 김예지 의원과 함께 12월 7일 윤 대통령 1차 탄핵소추안 표결에 참여했다. 또 14일 2차 탄핵소추안 표결 전에는 국회 앞에서 피켓을 들고 1인시위를 하며 국민의힘 의원들에게 투표 참여와 탄핵소추안 찬성을 호소하였다. 그런 김 의원이 2차 표결 직후 괴로워하는 모습으로 한동안 본회의장을 떠나지 않았다. 자신의 양심을 지키다가 소속 정당의 따돌림을 받는 상황에 마음이 아팠을 것이다.
양대 정당 복점의 해법은 연동형 비례대표제
정치인들이 공익을 무시하고 사익을 추구하는 정치판을 개혁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정치인과 국민의 인성을 개선하거나, 민주시민교육을 강화하는 것이 근본 대책이다. 그러나 근본 대책은 멀고도 험하다. 물론 그 방향으로 꾸준히 나아가야 하겠지만, 우선 양대 정당 복점부터 해소하는 게 더 현실적이다. 프랑스 정치학자 모리스 뒤베르제(Maurice Duverger, 1917~2014)는 단순다수대표제인 소선거구제로 뽑는 총선과 결선투표 없는 대선은 양대 정당을 낳는다는 이론을 제시했고, 학계에서는 이를 ‘뒤베르제의 법칙’이라고 부른다. 이 법칙은 우리의 상식과도 다르지 않다.
유럽의 여러 모범적 민주국가에서 실시하는 연동형 비례대표제는 양대 정당 복점의 가장 유력한 해법이다. 다양한 정당이 공존하는 정치 생태계에서 정치인은 자신의 정치적 소신에 맞는 당적을 가질 수 있고, 소속 정당이 자신의 지향과 다른 모습을 보일 때는 당적을 옮기거나, ‘배신자’들이 힘을 합쳐 새로운 정당을 만들 수 있다. 국민도 다른 고려 없이 자신의 가치관과 신념에 맞는 정당과 후보를 지지하게 된다. 인류와 지구를 구하려는 녹색당이 유럽에서 존재감을 보여주는 이유이기도 하다.
양대 정당 복점 체제에 물들어 있는 우리 풍토에서는 거대 정당이 아니면 선거에서 매우 불리할 것이라는 고정관념이 있다. 그러나 제한된 비례대표제를 가진 우리나라에서도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이 조국혁신당 사례에서 입증되었다. 제22대 4.10총선에서 조국혁신당은 비례정당 투표에서 24.25%를 득표하여 국회의원 12석을 얻는 돌풍을 일으켰다. 지금과 같은 어정쩡한 ‘준’연동형 비례대표제가 아니라, 득표율과 의석수가 비례하는 완전한 연동형 비례대표제였다면 무려 73명이 당선될 수 있었다.
이제 응원봉으로 거대 양당을 압박해야
22대 총선에서 거대 양당의 지역구선거 득표율은 95.5%였다. 지독한 복점이다. 더불어민주당은 지역구 득표율이 50.4%인데 지역구 총의석수 254석의 63.4%인 161석이나 차지하였다. 국민의힘은 45.2%를 득표하고도 겨우 35.4%인 90석만을 차지하였다. 이렇게 현행 제도는 민의를 왜곡하고 있다. 현 시국에서는 여론의 비판이 국민의힘에 집중되고 있지만, 조직 이기주의에 매여 연동형 비례대표제에 소극적으로 임했던 더불어민주당도 반성해야 한다.
이러한 정치판에서 정부와 여당이 재량껏 추진할 수 있는 정책은 거의 없다. 다당제였다면 사안에 따라 정당 간에 협상과 타협을 해나갈 수 있지만 거대 양당의 여소야대 구도에서는 극한 대결로 치닫기 쉽다. 이런 상황에서 윤석열 정부는 거부권 행사와 이재명 공격을 일삼았고, 점점 더 궁지에 몰리자 계엄이라는 엉뚱한 방식으로 대응하고 말았다.
대통령 탄핵은 대통령을 파면할 수 있는 수단일 뿐 병든 정치판을 고치는 치료법이 아니다.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빨리 도입해야 한다. 헌법을 고칠 필요 없이 공직선거법만 손보면 된다. 계엄-탄핵 사태가 국민의 여망대로 해결된 후에는 탄핵 응원봉이 방향을 틀어, 기득권을 지키려는 양대 정당을 압박해야 한다. 새해, 을사년에는 ‘으샤으샤’ 힘차게 나라를 바로 세우는 해가 되기를 빈다.
참고: 연동형 비례대표제만으로 문제가 다 해결되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다른 정치개혁에 대해서는 아래 칼럼을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 칼럼에서 정치 생태계 다양화를 위한 정당법 개정, 일반 국민 중 추첨으로 구성하는 시민의회 도입, 대통령중심제에서 내각책임제로 이행 등을 제시했습니다.
"윤석열 1년, 국민의 실망" <평화뉴스> 칼럼(2023년 5월 1일)
[김윤상 칼럼 146]
김윤상 / 자유업 학자, 경북대 명예교수. 평화뉴스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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